[본문] 시편 42:1-11
[찬송가] 183장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부재 중 갈급함(1-5)]
시편 42편은 찬양으로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갑급하나이다" 우리는 예배 전 잔잔하게 이 찬양을 부르며 말씀을 묵상하곤 합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찬양 때문인지 1절을 읽을 때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폴짝폴짝 뛰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묘사하는 분위기는 결코 평온하지 않습니다. 사슴은 동물 중에서 갈증을 가장 많이 느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마름을 느낄 때 팔짝팔짝 뛰어다닙니다. 곧 사슴이 물을 찾을 때는 간절하고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좋아서, 행복해서 뛰는 것이 아닙니다. 갈급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 애타는 심정으로 물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란 찬양은 잔잔하게 묵상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시인도 사슴과 같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외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전 지금 죽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이러한 갈증이 생깁니다. 결핍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목 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2-3)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사람들은 시인에게 묻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조롱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러냐?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냐? 너는 버림받은 것이 분명하다"란 뜻입니다. 한 두 번이 조롱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종일토록 이어졌습니다. 그의 마음이 짓눌리고 부서졌습니다. 상처 입힌 감정은 눈물로 흘러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상황을 놓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었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으며, 다윗 왕가는 몰락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 외쳤건만, 그분은 이스라엘을 버린 듯 보입니다. 희망은 아득하고, 회복을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이 간절한 외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슬픔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찾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껍데기일 뿐,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그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사시사철 푸르게 하듯이,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의 상한 마음을 고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히브리어를 번역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입니다. 이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듯한 고통으로 탄식합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인은 과거에 예루살렘이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사람을 인도하며, 기쁨과 감사로 찬양했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금의 상황이 더 가슴이 아프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도, 누렸던 은혜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코로나19 팬더맥을 겪었던 때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시기, 우리는 모두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건강, 직장 어느 것 하나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몸소 깨달았습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그는 낙심했고,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갈망했지만 그가 마신 것은 눈에서 흐른, 쓰디쓴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귀에는 여전히 조롱이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도,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인해 나는 다시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답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만이 다시 찬양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할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을 두라"를 원어로 '야할(יחל)'이고, '기다리다, 바라다'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래야 합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시편 42편5절, 11절, 43편5절에서 총 3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는 각 문단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며, 42편과 43편이 하나의 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잊으심 중 소망(6-11)]
6절부터 10절은 1절부터 5절의 내용이 반복하는 듯 보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낙심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신 듯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인은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요단 강과 헤르몬과 미살 산이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북쪽으로,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곧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거리를 넘어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나타냅니다. 곤경, 하나님의 부재감과 거리감 속에서도 시인은 다시 주님과의 추억을 회고합니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나를 휩쓸었다'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입니다. 나를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려 애쓰지만, 감정은 좀처럼 평정을 되찾지 못합니다. 믿음을 회복하려 노력해도 뿌리 뽑히지 않는 슬픔이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깊은 바다의 파도가 부딪쳐 울리는 소리처럼 몰아칩니다. 때로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진실로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땐 머리로는 알지만, 맡기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들어도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폭포와 바다, 파도와 물결은 그저 마주하는 자연현상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주의' 폭포, '주의' 바다 입니다. 사람이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 강하다 여기는 것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이 아닌 만든 피조물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하셨겠습니까? 그는 자신을 몰아치고, 무너뜨리게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주를 바라보려 합니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낮과 밤 곧 온종일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며, 찬송과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로,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함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를 붙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함과 기도로 나아가게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선 그는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시인은 반석 되신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시고, 원수의 압제와 슬픔 가운데 떠돌게 하실 리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전에 함께하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 리가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원수의 압제는 이방인의 압제로 보입니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믿음과 결심은 하나님께로 향하지만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적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뼈를 찌르는 칼'이란 표현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은 못박혔고, 창에 깊숙히 찔렸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서기관과 장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희롱했습니다.
(마 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적들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들은 주님께서 그의 종의 곤경에 관심이 없으시고 일하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는 42편과 43편의 반복구입니다. 5절과는 비교해 보면 뒷부분이 조금 다릅니다. 5절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인데, 11절은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시인은 다시 영적으로 침체된 자신을 책망하며 격려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비난하는 자들의 말에 낙망하거나 불안해 하지 말고,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라고 스스로 권고합니다. 불편과 어려움의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에게 찬양과 감사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괴로운 원인은 돈이나 건강, 조롱, 불확실한 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뢰가 깊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궁극적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바벨론 포로기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라와 성전을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현재를 과거의 아름다웠던 날들과 비교할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절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순간, 마치 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삶의 모든 무거운 짐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짓눌렀던 고통은 더 이상 무게를 갖지 못합니다. 압도되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만약 세상이 우리를 압도한다면,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바쁘게 살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눈앞의 즐거움과 성취로 순간을 채운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는 폭풍 속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말하고, 하나님의 부재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합니다. 가뭄이 온 땅은 본능적으로 물을 찾습니다. 하지만 만약 목마름조차 느끼지 않는다면, 그 땅은 이미 죽은 땅일 것입니다. 죽은 피부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듯, 영혼도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온갖 고난 당한 뒤에야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울며 탄식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마음을 쏟아는 자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탄식에서 찬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회복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음을 압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을 부르짖고 찾사오니 우리를 홀로 두지 마옵소서. 주님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짓눌리고 물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고, 빛과 소금임을 잊어버렸다면, 다시 주님께 붙잡힌 바 되어 살아가도록 깨어지게 하옵소서. 주어진 사명을 따라 방황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목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까?
2.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없음에 고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습니까? 이를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시인을 낙심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였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며, 도우시길 바랐습니다. 영적 침체 속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성: 김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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