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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왕되심(시 2:1-12)

by 육아_Daddy 202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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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2:1-12
[찬송가]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책의 서론은 전체 내용의 주제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성경 책들의 대다수가 그러하고, 시편 또한 동일합니다. 시편의 서론은 1-2편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이 그 중 하나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1편과 2편이 각각 나뉘어 있지만, 학자들은 이 두 시편을 하나의 시편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두 시편의 시작과 끝에 반복되는 "복 있는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아쉬레’(אַשְׁרֵי) 때문입니다. 시편 1편1절의 "복 있는 사람은(אַ֥שְֽׁרֵי)"과 시편 2편12절의 "복이 있도다(אַשְׁרֵי)"는 동일한 단어이며, 이는 두 시편이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1편과 2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묶여 있음을 암시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시편 2편을 인용할 때, 한 사본에서는 이를 "첫 번째 시편"이라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서론인 시편 1편과 2편을 잘 이해하면 시편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시편은 총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은 1-41편, 2권은 42-72편, 3권은 73-89편, 4권은 90-106편, 5권은 107-150편으로 나뉩니다. 이러한 다섯 권의 구분은 모세오경의 다섯 권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신앙 여정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시편의 구성입니다. 시편의 표제어를 통해 살펴보면, 1권에는 다윗의 시편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1권의 1-2편, 10편, 33편을 제외한 모든 시편이 다윗의 이름을 표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권을 다윗시 모음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표제어가 없는 시편는 앞뒤 편과 반복되는 단어나 주제를 통해 다윗의 시와 연결성을 보이기에, 시편 1권을 다윗의 신앙적 고백 모음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편은 다윗의 시로 시작되며, 그의 일생을 담고 있는 듯 합니다. 

장르를 통해서도 시편 전체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서론인 중 1편은 지혜시로, 복 있는 사람을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정의합니다. 2편은 제왕시로, 세상을 다스리는 참된 왕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복된 삶임을 선포합니다. 이 두 시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통해 시편 전체와 1권의 핵심 메시지를 제시하며, 본편으로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편 3편부터 등장하는 시의 장르가 주로 탄식시라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긍정적이고 복된 삶을 선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통의 목소리가 드러납니다. 탄식시의 빈도를 살펴보면, 시편 1-3권에서는 탄식시가 많이 등장하지만, 4-5권으로 갈수록 탄식은 점차 줄어들고 찬양시가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5권의 145-150편에는 할렐루야 시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시편의 흐름이 탄식에서 찬양으로 전환되는 구성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이러한 구성은 우리에게 인생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삶의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우리는 눈물과 고통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결국 찬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시편의 마지막에서 "할렐루야"로 외치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결론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시편은 탄식에서 찬양으로, 고통에서 감사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성도의 삶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구조와 내용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더 많지만, 지금은 시편 2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1-3)]

시편 2편은 1편과 하나의 시로 묶여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나온 2편은 그 말씀으로 세상을 비추어 보는 듯합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에서 "꾸미는가(הגה)"라는 단어는 시편 1편 2절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הגה)"에 나오는 "묵상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시편 1편에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2편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헛된 일을 묵상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왜 분노하며, 왜 헛된 일을 묵상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해 합니다. 

[(2-3)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1절에서 말하는 "헛된 일"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거역하며 대적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족쇄와 사슬처럼 느껴졌고,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자유'를 외쳤습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기보다 스스로 주인이 되길 바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묵상은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조롱과 진노, 그리고 왕(4-9)]

[(4-5)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의 반란에 조금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헛된 일을 좇는 자들을 비웃으십니다. 그들이 스스로 강력하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늘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위와 지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분노하며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조롱하시고 진노하십니다. 왕들은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라며,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6-7)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자신을 대적하고 떠난 세상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방 왕들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선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시온 산에 왕이 세워지는데, 이곳은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는 네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삼하 7:14)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집과 나라, 왕위는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6). 이 언약이 시편 2편에서 재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의 계보를 이어 왕들을 세우셨고, 결국 그 계보에서 메시야, 곧 기름부음받은 자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구원할 왕이자 심판할 자입니다. 이 예언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행 13:33; 히 1:5; 5:5 등). 특히 7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떠오르게 합니다(마 3:17; 막 1:11; 눅 3:22).

[(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왕에게 구하라고 합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구하라"(왕상 3:5) 물으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왕이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의 통치가 서는 일일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은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또한 무너진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할 왕에게 하나님은 전세계 통치권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나라들의 땅은 왕의 유업이 되고, 그의 다스림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철장은 왕권과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철제 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대적자들을 산산이 부수실 것이며, 그들은 질그릇을 산산이 깨뜨려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파괴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 되심이 온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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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대한 경고 그리고 메시아의 통치(10-12)]

[(10-12)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길에서 망하지 않기 위해 해야할 네 가지 명령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교훈을 받으며, 두려움 중 기뻐하고,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는 명령인 동시에 경고입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왕들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까지도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왕 앞에 굴복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시 1:6).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것은 복종을 의미합니다(삼상 10:1; 왕상 19:18; 시 72:9; 사 49:23; 미 7:17). "두려움 중에 기뻐하라"는 표현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누리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되찾고,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 명령에 신속히 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은 분노의 불이 이미 붙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노가 언제 임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길을 가다가 갑작스레 심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할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을 붙들 것일지 결정해야할 시간이 있습니다. 만약 무릎 꿇고 굴복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1차 독자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당시 다윗 왕권은 다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되지 않은 듯 보였고, 회복의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오늘 말씀은 이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너희 자신에겐 희망이 없다. 너희가 너희의 삶의 주인이 돼서 열심히 달려온 결과가 지금 이것이다. 내가 너희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되고, 이 세상을 내가 다스려야 된다. 내가 바로 너희 왕이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께 돌이킨 자만이 긍휼과 은혜를 받고,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오만한 길을 걸었던 자들에게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명령, 복종과 굴복을 요구하는 말씀은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과 죄를 내려놓고, 부정함을 인정하며, 무너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왕 되심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왕 앞에 모든 것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는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이기셨고, 승천을 통해 그의 왕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실 것이며, 온 땅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정의는 시편 2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왕 되심 앞에 굴복하고 그 안에서 피하는 자입니다. 이는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현실속에서 탄식하며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은 찬양하는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주어지는 대로 따라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곁에서 유혹합니다. "적당히 살아도 돼. 양다리 걸쳐도 괜찮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야. 자유를 달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자유, 마음껏 즐길 자유를 달라!" 마치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명장면처럼 "Freedom!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며, 결국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죄악의 달콤함을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좋은 걸 못하게 하는 거지?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처럼 들릴 때, 그저 우리를 옥죄어 오는 족쇄처럼 느껴질 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품기 시작했다는 반증입니다. 

돈, 명예, 힘을 외치는 세상을 이길 방법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고, 참된 왕이신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렵게 만들고 싶다면, 우리가 그 왕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세상을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우리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신앙의 무너짐 속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고통과 아픔, 슬픔 가운데 주저앉아 있다면, 하나님의 왕되심, 그 기초를 다시 다잡기 원합니다.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누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누가 우리의 주인입니까?"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며 섬기면서 신앙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한 삶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쉬운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나이나 상황을 막론하고 우리 삶에는 언제나 어려움과 고난이 따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넘어지고, 좌절하며, 때로는 엎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안 된다"는 절망적인 말 대신,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온 땅의 왕이심을 고백했으면 합니다. 주께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만 참 자유와 진정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다시 주님께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하나님의 왕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 되게 하옵소서. 굳어버려 깨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 창문을 열어 부드러운 심령을 허락받게 하옵소서. 주께 받은 그 은혜로 앞으로 마주할 삶 속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고, 걸어야 할 길을 걸을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욕망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방 나라들은 말씀이 아닌 헛된 일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유사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며, 이에 관해 적어 봅시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의 대적에 비웃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겠습니까?
3. 시편 2편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 되심에 굴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요?
4.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작성: 김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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